퇴사 회고 및 부검

1년을 어찌저찌 채우고 퇴사를 하게 되었다. 어떤 시간이었냐고 물으면, 한국 사회의 어엿한 직장인으로 성장한 시간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AI의 급격한 발전으로 개발 씬이 완전히 바뀌었고, 개발 팀이 약한 회사에 있다 보니 기능을 뽑아내는 일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AI에 많이 의존하며 업무를 했다. 원래 하던 방식으로 (느긋하게) 서비스 전체를 보고 동료들과 (나름대로 치열한) 논의를 해서 그렇게 해서 만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소위 '갈린다'라는 표현을 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몇 년 만에 일이 해도 해도 끝이 안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빠르게 만들어내면서 얼마간은 정말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지만 뭔가 빠르게 치고 나아간다는 점에서 보람도 있었다. 하지만 계속된 압박과 중간 점검이 없는 상황에서 정말 이게 맞을까? 이게 스타트업인가? 사실 많이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압박받는 상황에서 내가 하는 일이, 해야 하는 일이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느낌을 계속 받았던 것 같다.
그러던 와중에 AI는 너무나 빨리 발전해서 내가 몇 년간 갈고닦고 더 잘하고 싶어 안달했던 것들을 더 쉽고 빠르게 해내버렸다. 개발만 그렇겠냐마는, 약간의 허무함도 밀려왔다. 링크드인에서는 똑똑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AI 에이전트를 어떻게 똑똑하고 많이 돌리는지, 얼마나 효율적이고 자동화된 시스템을 구축해서 AI에게 일을 위임하는지를 계속해서 자랑하는 글들이 올라왔다. 그들처럼 해야겠다, 뒤처지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면서 동시에 마음속 포모(FOMO, fear of missing out)가 일었다. 좀, 피곤했다. 자아가 생긴 이후로 적어도 20년 넘게 뒤처지면 안 된다고, 기왕 하는 거 다른 애들보다 잘해야 한다고 믿으며 살아왔던 나인데 그런 마음이야말로 정말 해도 해도 끝이 안 난다는 것을 나는 몇 년 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왜 퇴사했냐면, 결국 사람 때문에 퇴사한 게 맞다. 결이 안 맞았다. 아니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맞을 순 없잖아? 나도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같은 팀이니까 어느 정도 이해하고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근데, 이게 맞춰지는 거 정말 맞나?
퇴사를 결심하고 결정한 시점에 2차 면접을 보게 된 곳이 두 군데가 있었다. 한 군데는 지금 글을 쓰는 시점에 떨어졌다 연락이 왔고, 한 군데는 아직 연락이 없지만 면접을 보면서도 망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큰 기대는 없다.
직무 면접도 통과했는데, 컬처가 안 맞아서 떨어진다? 유감이다. 막상 떨어지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하 또 떨어져? 말이 좋아 컬처 면접이지 그냥 사상 검증 아니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많은 대표님들은 직원들이 주인 의식 갖고 열심히 해주길 기대하지만 애초에 그 생각은 틀렸다. 내 게 아닌데 주인 의식을 어떻게 가지지? 아무리 돈을 많이 준대도 그건 그렇게 해서 생기는 게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함께하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그런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사실 문화라는 것도 그렇다. 결국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좋으면 회사 문화 별게 없어도 그 사람들이 문화가 된다. 자발적으로 문화를 만든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면 그럼 사실 다 쉬워진다.
여하간 수십 곳에 지원하고 수십 번의 면접을 본 나는 이제 그런 프로세스에 질려버렸다. 나는 뭔가가 주어지면 항상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 말은 이렇게 해도 막상 일이 주어지면 그걸 잘해내기 위해 정말 노력하는 사람이다. 밥 먹다가도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고, 슬랙 알람이 울리면 안 보고는 못 배긴다. 직접적인 내 업무가 아니라도 이슈가 종료될 때까지 주시하고 있다. 근데 고작 그 한 시간 동안 나랑 몇 마디 나눈 걸 가지고 평가한다니, 솔직히 섣부른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정확히 잘 작동했으면 회사에 돌아이는 왜 있겠어.
이제 한 7년 일했나? 이젠 회사 게 아니라 나만의 것, 내 발자취를 만들어야 한다. 그게 글이든 소프트웨어든 뭐든 이젠 내 걸 해야 한다. 단지 내가 만든다고 해서 내 거라고 착각하고 싶지 않다. 회사를 조금 다녀보니 점점 더 날것의 자아는 숨겨진다. 수그러든다. 생각이라는 것이 희미해진다. 물론 그게 나쁜 건 아니다. 사회에 잘 적응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니까. 근데 그냥 나 자체가 무미건조해진다고 해야 하나? 내가 뭘 잘했더라? 내가 뭘 좋아했더라? 뭘 하고 싶었더라?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약간은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 말 그대로 내 자신의 회색빛깔이 되어 간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어릴 때 나는 누구보다 무지개 빛깔이었던 거 같은데. 그냥 막 비비드(vivid)했던 거 같은데.
나는 학교 다닐 때부터 글을 잘 썼다. 자랑 좀 하자면 인천시 백일장에 나가서도 상을 타고 그해 연도 문집에도 실렸다. 물론 이건 우리 엄마 덕이 큰데, 엄마 얘기도 할 말이 한 보따리이니 그건 나중에 차차 이야기하기로 하고 다시 돌아와서, 나는 작가라는 꿈을 가져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뭔가 글을 쓰는 일을 항상 동경했던 것 같다. 그래서 한때 나는 광고쟁이가 꿈이었고 카피라이팅을 기가 막히게 잘 쓰는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었다. 문과에서는 광고홍보학과 입결이 너무 높아서 그 근처에도 못 갔으니 뭐, 지금 그 산업이나 회사 문화가 어떤지는 잘 모른다.
그냥 하고 싶었다고.
또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져버렸는데, 다시 돌아와서 그래서 회사에서의 1년이 어땠냐고 하면, 일단 많은 동료를 떠나보냈고, 처음부터 퇴사 때까지 맡았던 올팜이라는 서비스는 잘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그 잘을 몰라서, 제품도 모르겠고 유저도 모르겠어서 이리저리 삽질하다 그만두게 되었다. 기능도 많이 만들고 테스트 자동화도 해보고 이것저것 더 쉽게 잘하려고 많은 것들을 시도했지만 그 무엇도 나를 계속해서 거기 있게 붙잡진 못했던 것 같다. 물론 내가 시도하지 않았던 것들이 여전히 많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난 그 제품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 달려갈 동력을 잃어버렸고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 레일에서 내려왔다. 그래도 제품을 성공시키기 위해 데이터를 적재하고 분석하고, 빠르게 실험해보고 검증하려는 그 시도와 태도, 열정은 배울 수 있었다. 한 회사에서 계속 잔류했으면 배우지 못했을 것들을 가까이서 보고 배울 수 있었던 소중한 1년이었고, 아쉽게도 결국 마음이 동하지 않아 그만두게 되었지만 그래도 또 나를 응원해주는 많은 감사한 인연들을 만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니 일하면서 멘토링도 해보고 싶어 신입 / 주니어 분들 대상으로 1대 1, 1시간 비대면 멘토링도 진행했었다. 다들 비슷한 고민으로 각자의 터널을 걷고 있었고 그래도 몇 년 더 살아본 사람으로서, 나도 아직 뭐가 뭔지 모르지만 난 이랬다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건넸다.
나는 원래 여러 시도를 해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비록 이번 도전은 짧게 끝나고 말았지만 나를 더 깊게 알게 된 소중한 시간이자 경험이었고, 또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이제 더는 미루지 말고 내가 그동안 해보고 싶었지만 여러 이유로 핑계 대며 못했던 것들을 하나씩 해나가면서 또 성장하고 배우고자 한다.
그래서 앞으로 뭘 해볼까 하면, 1인 개발도 하고 이것저것 공부도 좀 더 하고 놓았던 영어도 다시 시작해보고, 글도 좀 더 본격적으로 써보려고 한다. 최근에 강릉에 전 회사 동료들이랑 놀러 갔다 왔는데, 거기서 되게 괜찮은 서점을 들르게 됐다. 다양한 책이 정말 많았고 나도 진짜로 출판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용기를 얻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언젠가 꼭 출판해보고 싶다. (물론 적자가 나겠지만) 작가라는 꿈에는 한 발자국 더 가까이 간 것 아닌가.
진짜 내 걸 만들어 보고 싶다. 그게 어떤 형태가 될지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겠다. 진짜 무언가를 만들어서 팔 수도 있고, 소프트웨어가 될 수도 있고. 사실, 나는 여태까지 구직자 입장이었기 때문에 솔직히 니네가 뭐 그리 잘났어? 라는 비뚤어진 마음을 가지게 되었으나, 반대로 내가 구인을 하는 입장이라면 조금이라도 깐깐하게 사람을 보고 리스크를 줄이고 싶을 것이다. 이해는 한다. 하지만... 어쩌라고? 나는 구인하는 사람이 아닌데. 🤷♀️
막상 나와서 뭔가 해보자 하니 생각보다 좀 더 막막한 것 같다. 하고 싶은 건 많은데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 보면 잘 모르겠다. 내가 지금까지 이것밖에 못하냐며 욕했던 회사들이 그래도 흑자를 내고 돈을 벌고 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사람들의 지갑을 열게 하는 일이란 게 어디 쉬운가. 사람들의 숨겨진 니즈를 찾고 그에 걸맞은 가치를 주고, 그 가운데 돈을 버는 구조를 만드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 생각한다.
사람들은 때로는 단순하고 대부분 어렵다.
회사를 다니면서 내 콘텐츠를 만드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나도 그렇지만 사람들은 재밌는 건 홍보하지 않아도 귀신같이 찾아내서 잘 즐기는 것 같다. 물론 콘텐츠를 어떻게 만드는지, 어떤 콘텐츠를 만들어야 하는지 여전히 모르지만 하나 확실한 건 적어도 내가 재밌어야 남에게도 이거 재밌을 걸? 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오늘은 뭐 할 거냐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보려고.